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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침략하고 강제로 땅을 팔라고 하자 "흘러가는 구름, 뺨을 스치는 바람, 노래하며 날아다니는 새들, 철 따라 피고 지는 온갖 종류의 식물과 꽃들을 어떻게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하며 의아해했다. 시각의 차이는 시간의 차이다.

세상이 천지개벽하듯 빠르게 변해도 뼛속까지 반공 교육을 받고 자라 온 내 나이대에서 '사회주의'는 그다지 익숙지 않은 용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정부가 앞장서서 사회적 가치, 경제, 자본, 기업 같은 정책을 쏟아 낸다. 그러더니 마을 기업이나 협동조합에 몸담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북유럽을 다녀오고 나서는 '우리도 저들처럼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열변을 토해낸다. 대개는 처음이거나 많아야 두세 번 정도 유럽을 다녀온 이들의 눈에,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북유럽인들의 삶은 어떻게 비쳤을까?

행복은 소득에 비례하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소득이 늘어나는 만큼 행복은 비례하지 않는다. 그 분기점은 대략 1인당 국민 소득 5만 불 수준이다. 소득이 늘어나도 욕구의 수준 역시 늘어나면 행복감은 전혀 증가하지 않는 '이스털린의 역설'이다. 

우리는 국민소득 3만 5천 불을 이제 막 넘어선 상태다. 누가 뭐래도 여전히 돈은 소중하다. 사회적 기업, 사회적 경제가 아직 빛을 발하지 못하는 이유다. 숙성 기간이 필요하다. 시차가 있다는 얘기다. 

게임과 게임화 역시 마찬가지다. 중독에 빠지게 하는 게임이, 몰입을 지향하는 게임화로 성숙하기까지는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 

올림픽을 예로 들면, 유럽의 경우엔 학업 혹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운동을 즐기지만, 우리는 만사를 제쳐 놓고 목숨을 건다. 우리의 엘리트 체육이 유럽의 생활 체육 형태로 진화하려면 반세기는 족히 걸릴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워라벨(work & Life Balance)'을 들 수 있다. 워라벨은 '일과 삶 사이의 균형'을 뜻하는데, 그 시작은 1972년 미국의 자동차 노동자들과 제너럴 모터스가 국제 노동관계 컨퍼런스를 공동으로 후원하면서 직장 생활의 질을 노동 개혁을 위한 포괄적 개념으로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미루어 짐작건대 이즈음이면 서구에서는 고용 증대를 위한 일자리 나누기가 시작되던 시절이다. 그 명분은 노동 시간을 줄이는 대신, 삶의 질을 확대한다는 개념이다. 마치 한 때 우리나라에서 몇몇 정치인들이 내세웠던 '저녁이 있는 삶'과 닿아 있다. 그러나 이 캠페인은 빛을 보지 못했다. 근로자 1인당 연간 노동시간(2,113시간)이 OECD에서 멕시코(2,246시간) 다음으로 세계 2위인 우리의 근로 여건을 고려할 때, 이 표현은 시기상조이거나 혹은 왜곡됐을 수 있다.

우선, 일을 삶과 같은 의미에서 논의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삶은 일과 배움과 놀이의 융합체다. 그런데도 배움과 놀이를 삶에서 배제하는 이유는 산업혁명을 전후해서 대중 교육이 생산성을 증가시키려는 취지였기 때문이다. 농업 인력을 산업 인력으로 전환하려면, 최소한의 산수 능력과 문자 해독 능력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놀이가 자리할 곳이 없다. 일이 단지 '보수를 위한 노동(paid work)'으로 전락했음에도, 삶과 일을 같은 관점에서 포장해 미화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고의 관성에도 불구하고 일과 보상에 대한 사회적 환경은 계속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며칠 전 네이버는 전 직원들을 대상으로 주 3일제와 재택근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근무 환경을 전환했다. 이뿐만 아니라 보편적 기본소득제에 관한 다양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소상공인 3차 방역지원금이 확정, 지급되기 시작했다. 일과 일이 아님은 이제 더 이상 고용과 실업으로 양분할 수 없는 지경이다. 게임이 온전한 휴식으로 자리하려면 게임적 사고로의 전환 곧 게임화에 닿아야 한다. '워라벨'이 일과 삶의 대립이 아닌 그 융합(化)인 까닭이다.

 

김일철 하이터치 휴먼 랩 소장, 동의대학교 명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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